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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에세이

정의로움

 초등학교 시절 공산주의에 관해, 정확히는 그들의 몰락에 관해 배울 때, 교과서가 그 원인으로 지목한 것 중 노동에 대한 동기부여의 실패가 있었다. 다사다난했던 공산주의의 몰락 과정을 초등학생에게 가르치는 것은 적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결과론적 관점에서 이제껏 존재하였던 공산주의의 단점을 그렇게 설명하는 것에 대하여 딱히 반론하고 싶은 것 역시 아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이를 배우면서 우리 체계의 정의로움에 한 껏 들떴던 것이 생각나 잠시 부끄러울 뿐이다. 그때의 나는 능력 있는 자가 더 많은 것을 가져가는 우리 체계의 정의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왜일까. 아마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가 그게 정의라고 나에게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어린아이는 그렇게 사회화되는 법이다.

 지난주 우리 회사로부터, 적절한 스트레스는 나쁜 것이 아니라는 교육 자료가 배포되었다. 오징어를 잡아서 서울로 보낼 때, 서울로 배송하는 오징어 박스에는 꼭 작은 참게를 한 마리씩 함께 넣는다. 성질이 나빠 물 밖에 나오면 금세 죽어 버리는 오징어가, 참게라는 천적이 존재할 때에는 그를 피하기 위해 노력하느라 살아서 서울에 도착한다는 이야기다. 누군가에게 우리는 산 채로 회쳐 먹을 수 있는 불만 많은 오징어인 거다. 우리의 체계는 우리로 하여금 상급 오징어가 되기를 바란다. 스트레스 없이 금방 죽어 버려서는 상급 오징어가 될 수 없다. 난 이 것이, 정확히는 이런 이야기를 우리에게 교육할 수 있는 우리의 무신경함이 '능력 본위의 사회'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노력을 통해 보다 상급의 오징어가 될 수 있다. 오징어집 사장으로서는 이야말로 적절한 동기부여가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 세상에서 '부'는 아직 훈장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절대다수에게 '부'는 쌀이나 치약에 가깝다. '부'가 인류 번영을 위해 창조된 것이고, 정말로 우리 모두에게 평등하다면, '부'는 오히려 자신의 앞가림을 잘하지 못할 수 있는 능력 없는 자에게 더 분배되어야 한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그것이 정의라고 생각한다. 계급에 의한 차별을 거부하고, 능력에 의한 차별을 인정한 프랑스혁명에서부터, 우리는 첫 단추를 잘 못 끼웠다. 그 잘못이 이 수레바퀴를 굴리는 동력이라 할지라도 우리 중 누군가는 이를 경계해야만 한다. 정말로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생산 체계가 도래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다. 우리는 좋든 싫든 수레바퀴가 멈추게 될 그때에 하나의 인류로 남을지, 혹은 주인과 가축이 될지를 정하게 될 것이다. 현재로서는 전자가 되어야 할 근거로 그 존재 자체가 의심되는 인류애를 들 수밖에 없겠다.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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