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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에세이

선택적 윤리

박민규 작가

 박민규를 좋아한다. 그의 작품뿐 아니라, 그의 생각, 그의 기행까지 좋다. 지난 십여 년 동안 나는 그의 빠돌이였고, 그는 나의 아이돌이었다. 처음 읽은 것은 단편집인 '카스테라'였는데 그것은 참으로 텅 빈 냉장고에서 발견된 빵 같은 느낌이었다. 특이한 작가다.라고 생각했다. 05년도에는 모든 문학에 어느 정도의 데모크라시와, 다시 말해 전두환과, 다르게 말하자면 민주주의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것은 90년대 모든 문학에 하루키가, 다시 말해 존재론과, 다르게 말하자면 노르웨이의 숲이 있었던 것이나, 2014년 이후 모든 문학에 부끄러움과, 다시 말해 세월호와, 다르게 말하자면 무력감이 섞여 있었던 것, 그리고 나아가 2019년 모든 문학에서 페미니즘과, 다시 말해 헤이트 스피치와, 다르게 말하자면 분노를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 문학이 많았던 시절이었고, 또 그런 생각을 하며 읽을 수밖에 없었던 세상이었다.

 그러나 카스테라(2005)에는 데모크라시와, 다시 말해 전두환과, 다르게 말하자면 민주주의 같은 것들이 결핍되어 있었다. 사실 카스테라(2014)라거나, 카스테라(1995), 혹은 카스테라(2019)이었다 하더라도, 이 책은 텅 빈 냉장고에서 발견된 빵 같은 냄새를 풍겼을 것이다. 그야말로, 상당히 크고 단단한, 좆대로 쓴 책이 분명했다. 그 이후 박민규가 발표하는 글이라는 글은 다 읽었던 것 같다. 핑퐁, 지구영웅전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더블, 그리고 몇 편의 산문들과 문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특히 삼미 슈퍼스타즈의 팬클럽은 일종의 바이블로서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 과연 치기 어려운 공은 치지 않고 잡기 어려운 공을 잡지 않아도 이 세상에 생존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지만, 무엇보다도 강하게 나는 그런 세상을 원하는 것이다. 어느새 누군가의 의도대로 모두가 프로가 된 이 세상에 갑자기 화가 치밀 때면, 삼미 슈퍼스타즈를 생각한다. 세상에 저항하는 것은 때론 간단하다. 치기 어려운 공은 치지 않으면 된다. 난 세상의 모두가 삼미가 되길 바라는 조용한 몽상가이며, 때때로 그들을 따라 하는 의식을 수행함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얻는 어린이 팬이다. 그리고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바로 나의 바이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때문이다.

 사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명백한 표절작이다. 과거 PC통신 시절에 게시되었던 시리즈 연재물과 거의 문단 단위로 동일한 부분도 있을 정도다. 박민규는 자신의 소설이 표절임을 시원하게 인정했으나 아직도 원작자에 대한 어떠한 보상도 수행하지 않았으며, 한겨레 출판사와 박민규는 여전히 이 소설을 판매하고 있고, 그 수익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명백히 모순되었을 뿐 아니라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일이다. 표절 사건이 처음 붉어졌을 때를 기억한다. 나의 아이돌과 나의 바이블이 동반 투신하던 그 자리에서 나는 매우 오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누구에게 미안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여전히 박민규와 그의 작품들이 좋았던 것이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윤리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수호하는 기사의 역할을 자처하던 나로서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난 야당의 십 분에 일도 해 먹지 않았다던 노무현에게 주저 없이 돌을 던지는 냉철한 대중이었으나, 나의 바이블이 추락하던 그 순간에야 비로소 윤리적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모든 표절을 용납하겠다면, 그 또한 강박일 것이다. 나는 물론 표절이 싫다. 그럴 일이 있을까 싶지만 표절당하기 싫고, 표절을 하는 것은 더더욱 싫다. 그냥 내 마음 가는 대로 표절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표절은 작가 박민규를 좋아할 뿐이다. 왜 나 혹은 그가 윤리적으로 완벽해야 하나. 누구 좋으라고? 그때부터 나는 바람직하진 않겠지만 지키고 싶은 윤리만을 지키고 있다. 다시금 박민규는 표절 작가임을 선언한다. 그리고 그가 윤리적으로 올바를 행동을 취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그 이외의 부분을 사랑한다. 만약 사회가 용납하지 않는다면, 비로소 난 잡기 쉬운 공만 잡게 되는 것이다.

 

(c) James Nachtwey. All Rights Reserved. 

 

윤리는 종종 다른 가치와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제임스 낙트웨이는 가장 칭송받는 사진작가임에 분명 하나, 가장 많은 비난을 받는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사진은 아름답고, 때때로 그 아름다움이 비난의 근거가 된다. 예를 들면 위의 사진 같은 거다. 사진 속 인물은 에이즈 환자이며, 얼마 뒤 사망하였다. 그는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곁눈질로 보기에도 괴로울 장면을 당당히 마주하여, 완벽한 프레임이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렸고, 침착히 노출을 조정하여 흔들림 없이 촬영한 것이다. 사진계, 특히 다큐멘터리 사진계에는 이러한 일이 빈번하다. 오지를 촬영한 살가두의 웅장한 사진들이 그렇고, 케빈 카터를 자살로 몰고 간 한 장의 사진이 그렇다. 수전 손택을 비롯한 몇몇 무책임한 비평가들은 그들의 사진이 그들의 예술 욕구만을 충족시킬 뿐 만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을 본질에서 떼어 놓는 것에 기여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로 그랬나? 누군가는 물론 사진의 예술적인 면만을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나에게는 카터의 사진이 그랬다. 그러나 분명 많은 사람들이 그 사진들로 인해 실질적으로 움직였으며, 몇몇 시도는 고통의 당사자에게 도움이 되었다. 한 걸음 떨어져 사건을 관찰하면, 양상은 분명하다. 뉴욕의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르완다와, 시리아에서 활동하는 사진기자들을 조롱하는 몇몇 비평가들은 그들 책의 표지 혹은 속지에, 그들이 말하기로는 사람들을 본질로부터 떼어 놓는 사진을 수록하고, 인세를 벌어들인다. 반면 르완다와 시리아에서 포탄을 피하며, 때로는 실패하여 죽어가며 사진을 찍은 사람들은 실제로 서구의 사람들을 움직이고, 가끔 사람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기도 한다. 수지 린필드는 그의 저서 '무정한 빛'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폭력이 담긴 사진의 전파를 막고자 하는 자는 폭력의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많은 사람들은, 특히 이 사회의 진보인 척 가장하는 보수들은 도덕적 강박에 갇혀 있으며, 꼴사납게도 이를 남에게 강요한다. 이를테면, 친일파를 비난하기 위해 모든 친일파를 인격 파탄자로 만들어야만 직성이 풀린다. 이러한 행위는 명백히, 자기 편의 결집을 위한 정치적 행위다. 어떤 그룹을 명백하고 단순한 악으로 만들 경우, 관련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을 효율적으로 설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효율적이라 함은 물론 선거의 이야기다. 이러한 매도와 선동은 관련된 건설적인 사회 담론을 형성하는 것에는 도움될 것이 없으나, 몇 달 혹은 몇 년간 에너지가 유지되는 불티가 될 수 있으며, 관련한 지식이 있건 없건, 당사자이건 아니건, 사람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각자 한 개의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왜 친일파가 친일 행위 이외에도 성적으로 문란하거나,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가졌거나, 부정부패를 일삼아야만 하는가? 어째서 우리 사회는 이러한 강박으로 인하여 본질인 '친일 행위'에 대한 처벌의 회피 수단을 친일파에게 제공하는가? 이러한 강박의 피해자는 과연 누구인가? 애초에 우리는 친일 행위 자체에 대해 파고들 필요가 있다. 친일 행위자가 알고 보니 환생한 붓다였다고 해도, 만일 우리 사회가 친일을 처벌하기로 합의하였다면, 친일 행위에 대해 비난하고 처벌해야만 한다. 그의 선행에 대한 보상은 별개의 건으로서 다르게 보상받아야 함이 마땅하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우리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없다. 일할 시간이 없고, 사회에 공헌할 시간이 없으며, 놀고먹을 시간은 더더욱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윤리적으로 완벽해질 시간이 없다. 그것이 '내가' 지킬 양심을 선택하는 이유다. 모쪼록 이 양심이 이 사회와 부합하면 좋긴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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