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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에세이

이집트

 지난 2009년, 신종플루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이집트는 자국 내의 모든 돼지(25만 마리)를 도살하였다. 신종 플루에 의한 수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직후였다. 그러나 이 빠르고 단호한 조치는 며칠 후 WHO가 돼지와 신종 플루가 무관함을 선언하며 25만 생명을 담보로 한 블랙 코미디의 소재가 되었다. 돼지가 먹어치우던 음식물 쓰레기가 범람하면서, 카이로가 쓰레기 도시가 되었다는 소식이 이 블랙 코미디의 마무리. 아마도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무지한 이집트 관료의 단호한 얼굴을 기억할 것이다. 많은 경우에 단호함은 무지를 동반한다. 세상사에 단호해져도 좋을 만큼 단순한 일은 많지 않다. 

 그러나 앞서 소개한 이 사건의 개요에는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이 몇 가지 빠져있다. 우선, 이집트가 돼지를 도살한 시점에서는 돼지가 신종플루의 주요 감염원일 가능성을 배재할 수 없었다. (아직도 학계 일부에서는 신종플루-H1N1이 돼지에 의해 전파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Pandemic의 공포에 지배당했던 2009년의 세계 각국은, 굳이 이집트가 아니더라도 돼지의 도살을 검토하였다. 이 계획이 실행되지 못한 것은 첫째, 돼지가 멸종시키기에는 너무 맛있는 식재료였고, 둘째, 각 국의 양돈 협회들이 훌륭히 돼지를 변호했기 때문이었다.

 이집트는 90%의 이슬람교도와 박해받는 10%의 콥트교도(기독교의 종파)로 구성되어 있다. 이집트에서 콥트교에 대한 박해는 상당한 수준으로, 2011년부터 2017년까지 종교 갈등으로 인해 100명 이상의 콥트교도가 살해당했을 정도다.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 어려운 콥트교도들은 대도시 외각의 쓰레기 더미에 주거하며 넝마주이로 연명한다. 돼지를 먹지 않는 이슬람교도들은 넝마주이의 소유였던 25만 마리의 돼지에 대해 단호히 도살을 명령했다. 명령하는 자들에게 돼지는 맛있는 고기가 아니었고, 돼지를 위해 변호해 줄 사람 역시 없었다. 그러므로 이 단호함은 무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은 그래도 괜찮았던 거다.

 2009년 많은 사람들이 신종 플루에 대한 이집트의 멍청한 조치를 비웃고 조롱하는 것에 단호하였다. 많은 경우에 단호함은 무지를 동반한다. 세상사에 단호해져도 좋을 만큼 단순한 일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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