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ote/에세이

카페

190120-

  아이가 낮잠을 자는 사이 잠시 시간이 남아 예전에 자주 다니던 카페에 왔다. 오후에는 키즈카페를 겸하는 작은 동물원에 가족 나들이를 가기로 했으므로, 그야말로 잠시의 여유다. 몇 년 전 나는 단지 사람이 없어 보인다는 이유로 새로 생긴 이 카페에 들렀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직 가게를 오픈하기 전이었단다. 그런 설명을 하면서도 자리를 권하는 사장님이 좋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를 내오는 사장님이 좋았었고, 무엇보다 그렇게 시음아닌 시음을 하게 된 무료 커피가 좋았다. 커피를 마시는 내내 사장님은 세심하게 커피 콩을 고르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상당히 자주 이 곳에 들렀다. 내가 결혼을 하기 전의 일이다. 그게.. 벌써 몇년이나 되었다. 

  오랜만에 들른 이 카페에는 전에 자주 뵙던 사장님이 아닌 낯선 분이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오전에 이미 커피를 마신 탓도 있지만, 나도 모르게 커피 대신 모과차를 시키고 가장 구석 자리에 가방을 풀었다. 사장님이 세심하게 커피콩을 고르던 그 자리에는 테이블이 몇 개, 추가로 들어와 있었다. 질 좋았던 원목 테이블 가운데 몇 개는 합성목으로 교체 되었다. 몇 년 전 아내를 데리고 함께 왔을 때, 아내가 이렇게 좋은 테이블을 카페에 두어도 되냐며 놀랐던 그 테이블이다. 한참 아내와 함께 신혼집에 쓸 가구를 고르던 때의 일이다.

  그러니까 나는.. 아마도 천천히 실망을 하는 와중이었다. 모과차가 맛있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고개를 든 그 자리에 드라이 플라워가, 몇 해 전 찍었던 것과 같은 그 드라이 플라워가 있지 않았다면 난 이 실망을 완성할 수 있었을 거다. 카페의 벽에는 그 모습 그대로 드라이 플라워 한 다발이 정오의 햇볕을 받으며 걸려있었다. 어쩌면 먼지도 타지 않을까. 한 다발의 꽃에 의지하여 내 실망은 갈 곳을 잃었다. 인생의 많은 부분은 이런 작은 조각에 지배된다. 이 작은 조각은 현실을 회피하기에 충분한 단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단지 그것이므로, 이 세상이, 인간의 정신세계가 이 모양이라는 것은 다행이도 행복한 일이다. 인스타그램을 검색해 보니, 아마도 사장님이 바뀌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 또한 다행이다. 짧은 나들이가 끝나기 전에 핸드드립용으로 갈린 원두를 한 봉지 샀다.  

 


'note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의로움  (0) 2019.09.29
선택적 윤리  (0) 2019.05.17
2018 제주  (0) 2019.01.07
Fighter  (2) 2018.11.01
인공지능에 의한 위조된 공정성에 대한 우려  (0) 2018.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