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e/에세이2019.01.07 00:39

제주 첫날.

여섯 시에 일어나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조금 서둘러 청주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아홉 시 쯤이어서 여유있게 탑승할 수 있었다. 도진이에게는 이번 제주행이 생애 첫 비행이었는데, 그런 것 치고는 굉장히 태연하여 대견하였다. 제주에 도착해서도 제 때 아이 밥을 먹이고, 적당히 재우고, 사이 사이 맛있는 음식과 여유 있는 드라이브를 즐겼다. 우리 셋 모두 행복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모처럼의 제주를 즐겼다. 여행의 첫 날로서, 더할나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켠이 먹먹한 것은, 이 섬이 나의 가장 부끄러운 기억을 일께우기 때문이다. 김애란은 '눈먼 자들의 국가' 에서 당분간 '세월'은, 혹은 '침몰'은 은유로서 사용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나에게는 제주 역시 그렇다. 이 섬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난 내가 기억 하는 우리의 가장 큰 실패를 떠올릴 것이다. 내가 죽은 아이들을 대신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님에도 내 삶을 즐길 수 있듯이, 여전히 이 여행을 즐기겠지만, 그 감상에 이러한 사족을 더하는 것은 바로 그때문이다.


제주 둘째날.

펜션 앞, 해녀가 운영한다는 식당에서 전복죽을 포장해 아침으로 먹었다. 진한 화장을 한 여사장은 물질을 직접 할 듯한 인상은 아니다. 그러나 아마도 내가 첫 손님인 듯 말끔히 정리 된 식당내부는-창 밖의 바다와 돌과 먼지 쌓인 난로와 사람 손을 많이탄 늙은 개와 비루한 판매용 진주는- 그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제주 해녀의 집이다. 가만히 앉아 전복을 손질하는 여사장의 뒷모습을 보다보면, 물에서 막 나온 해녀가 여사장에게 망태기에 담긴 전복을 건네는 모습이 상상되는 것이다. 죽은 비리지 않고 맛이 있었다.

계획할 적에는, 오늘 오전에 작은 수목원을 들를 예정이었으나, 일기예보와 다르게 그치지 않는 가랑비로 인하여 온실을 겸하는 송당리의 카페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 곳에서 커피와 티라미수를 먹고, 튤립 구근 세개를 샀다. 씨앗을 샀을 뿐인데, 우리 부부는 벌써 꽃을 산듯 기뻤다. 도진이는 카페에서 기르는 고양이들과 함께 즐거웠다. 이 곳의 고양이들도 사람 손이 익숙한 듯 했다. 제주의 동물들은 사람에게 다정하다. 아름다운 이 동네를 떠나는 것이 아쉬워서 근처의 소품점에서 브로치와 유리 장식품을 샀다.

오후에는 해안 도로를 따라 이동하여 비자림을 구경하였는데, 추운 날씨 탓인지 도진이의 기분이 좋지 못하였다. 내일과 모레는 우리 부부가 각자 제주를 여행하는 날이므로, 비자림이 도진이의 마지막 관광코스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좀 쓸쓸하다.


제주 셋째날.

아내가 홀로 제주를 여행하는 날이다. 곧 잘 혼자 여행하는 아내이지만, 제주를 여행하는 것은 처음이란다. 내가 처음 제주를 홀로 여행했을 때의 설렘이 기억난다. 그 전에도 가족여행으로, 수학여행으로, 혹은 출장 관계로 제주에 자주 들렀었지만 내가 사랑하는 제주를 발견한 것은 2013년 홀로 제주를 여행할 때였다. 아내가 발견하게 될 제주는 나의 제주와 다르겠지만 역시 사랑스러울 것이다.

난 숙소에서 도진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도진이의 낮잠시간에 창 밖을 보니 파도가 거세다. 바람이 많은 날이구나. 창에는 가끔 굵은 눈도 몰아친다. 그와 반대로 따듯하고 고요한 집안은 독서하기 좋았다. 오랜만에 은교를 읽었다.

'눈이 내리고, 그리고 또 바람이 부는가. 소나무 숲그늘이 성에가 낀 창유리를 더듬고 있다. 관능적이다.'

관능적이란 표현이 너무 적나라하다고 해도, 이 날의 오후를 함께 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을 문장이다. 그러고 보면 제주 역시 가끔 은교 같기도 하다. 특히 아직 난개발이 되지 않은 중산간의 어느 마을을 만날 때 그렇다.



제주 넷날.

어제부터 내리던 눈이 눈보라가 되었다. 거센 바람이 통신선을 고장내어 숙소의 와이파이가 작동하지 않는다. 켄자스의 한 마을이 토네이도로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상상되는 그 바람이다. 아마도 도로시의 판자집을 날렸을 그 바람. 오늘은 내가 홀로 제주를 여행하는 날이다. 렌트한 아반테의 조수석 범퍼부터 뒷 휀다까지는 진한 녹색 페인트로 더럽혀져 있다. 우그러진 조수석 문은 잘 열리지도 않는다. 어제 이 차를 운전한 아내의 작품이다. 분명 여행하기 좋은 날은 아니다. 그러나 토네이도에 집이 날라간 안쓰러운 도로시가 장장 40권 분량의 놀라운 이야기를 발견했듯이, 나 역시 오즈 못지 않은 제주에서 이야기를 만들거다. 더군다나 우리는 아시아나 OZ8231편을 타고 제주에 도착해, OZ8232편으로 복귀하지 않던가. 어찌되었던 여행에 출발하는 나는 맥락보다 들떠 있었고, 신이 나 있었고, 이미 행복했다. 단지 계획에 있었던 새벽 오름 투어를 조용히 취소했을 뿐이다.

송당리에서는 간단히 기념품을 사고, 표지판에 이끌려 계획에 없던 인문학 카페를 들렀다. 자리 배치가 굉장히 특이한-강의실과 유사한- 카페였다. 상당히 대중적인 서적으로 짜여진 책장이 있었고, 역시 대중적인 취향의 작은 서점을 겸하였다. 커피는 핸드드립 메뉴가 있어 시켜 보았는데, 장서 보다는 내 취향에 맞았다. 한 시간 정도만에 속독으로 박민규의 지구영웅전설을 읽었다. 손님은 나 뿐이었고, 카페의 프런트는 자리에서 잘 보이지 않았다. 대신 큰 창이 있어, 날리는 눈과 함께 혼자 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점심은 근처의 멋들어진 카레집에서 해결하였는데, 별로 맛이 없었다. 눈 내린 송당리는 '관능적'일 정도는 아니어도 아름다웠다.



오후에는 유명한 만춘서점에 들렀다. 근처 독립서점들이 휴무였던 탓인지, 사람이 바글거려 멋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이 곳에서 사고 싶었던 책과 우연히 만난 책을 한 권씩 구매했다. 사고 싶었던 책은 '존 버거의 초상'으로 장 모르가 찍은 것이다. 우연히 만난 책은 수지 린필드의 '무정한 빛'이다. 표지만 보고 고른 '무정한 빛'을 근처 카페에서 펼치자 마자, 평론가로서의 존 버거에 대한 매몰찬 비평을 마주친 것이 재미있다. 존 버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지성이다. 수전 손택의 논리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 날카로움에 가슴이 먹먹해졌다면, 존 버거는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나의 마음을 얼러주었다. 아직 책의 절반을 채 다 보지 못하였지만 수지 린필드는 그 둘에 비해 나에게 우호적인 비평가임이 확실하다. 좋아할 만한 비평가를 만남에 행복하다.

다시 가족과 함께 한 저녁은 포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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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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