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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에세이

저항예찬

1993년 대전의 하천은 누가 보아도 더러웠다. 아마도 전교조였던 우리 선생님은 이 같이 썩은 물에서는 실지렁이 밖에 못 산다며 목이 터져라 열을 내셨고, 학기에 한 번정도는 갑천변에 나가 쓰레기를 줍는 봉사활동을 시켰다. 썩은 물 가득한 물가에서 검은 봉지 가득히 쓰레기를 줍고 나면, 천이 깨끗해졌다기 보다는 나까지 이 천에 동화되어 손 바닥 깊숙한 곳에서 악취가 느껴졌던 곳, 그런 곳에서도 외할아버지는 출조하실 때 마다 팔뚝만한 잉어인지 붕어인지를 너댓마리 씩 잡아오시곤 하셨다. 무뚝뚝하셨던 서산 사람 친할아버지와 달리, 나의 서울 사람 외할아버지는 기쁨을 감추지 않으셨다. 집에 돌아오시면 손주들에게 자랑할 겸 우리 집 빨간 고무 대야에 물을 채워 잡아 온 물고기들을 풀어 놓으셨는데, 한 번 날카로운 낚시 바늘에 주둥아리가 꿰어졌었기에 녀석들은 꿈틀거리면서도 실 같은 핏물을 쪽쪽 내뿜었다. 나는 녀석들에게 손을 뻗어 대가리나 꼬리를 만져보았다. 이미 힘도 피도 빠져버린채 새로운 둥지로 실려 온 그 것들은 순종적이었다. 열을 내는 나의 선생님과, 기쁘고 늙은 우리 할아버지와, 크고 순종적인 녀석은 묘하게 공유하는 것이 있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90년대 영화에서 느껴지는 진한 녹색조 같은 시대의 냄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 국민학생이었던 내가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부터 외할아버지는 갑천에 나가는 대신 유료 낚시터에 다니셨다. 그 것은 아마 갑천이 제대로 정비되었기 때문이다. 갑천이 새 생명을 찾고 악취를 씻어내었기 때문이다. 공무원들이 낚시꾼들을 쫓아내고, 물을 정화하고, 포크레인이 천변 공원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마간의 눈치가 있었던 서울사람 우리 외할아버지는 입장료를 내고 낚시터에 가게 된 것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낚시터에는 물과 치어가 공급되는 일종의 입구 부분이 있었다. 그 곳에서 낚시를 하는 것은 규칙 위반이었던 듯 하지만, 어린이가 노는 것 정도는 용인되는 분위기 였다. 외할아버지는 내게 작은 낚시대를 쥐어 그 곳으로 보냈다. 그 낚시대는 낚시 줄 끝에 떡밥통이 달려있고 주위에 여러개의 바늘이 달려 있는 형태로, 큰 물고기를 낚을 수는 없었으나 대충 던져 넣으면 새끼 손가락 만한 작고 어린 물고기들이 몇 마리씩이나 물려 나오는 그런 구조였다. 처음에는 그 작은 물고기조차 무섭고, 날카로운 낚시 바늘도 무서워, 물고기가 낚이면 외할아버지께 쪼르르 달려가 빼달라고 부탁하곤 했었는데 몇 차례만에 스스로도 잘 할 수 있게 되었다. 낚인 작은 물고기들은 몸의 여기 또는 저기가 낚시바늘에 통째로 꿰어 있는 상태였고, 하나 같이 은색 비늘을 가지고 있었다. 녀석들은 처음에는 죽은 듯 늘어져 있다가도 내가 낚시 바늘에서 빼내려고 하면 국민학생이 잡기 어려울 정도의 놀라운 힘으로 몸을 흔들어 댔다. 그 것을 꽉 잡아 빼내어 다시 물로 던지고 나면, 내 손에는 아름다운 은색 비늘이 남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살려 주기 위해 풀어주었다기 보다는 필요 없기 때문에 버려진 그 치어들은 그렇게 초등학생의 손에 흔적을 남기는 거다.

사실 그 때도 지금도 나는 낚시에 취미가 없고, 외할아버지와는 이런 소소한 것보다 더 재미있는 추억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 것은 빨간 고무 대야의 녀석들과 내 손아귀의 녀석들의 맹렬한 대비 때문이다. 무기력함은 추하다. 저항은 아름답다. 내 시선 전반을 가로지르는 미적 기준은 이러한 이야기들의 중첩으로 생겨났다. 예수의 아름다움은 천국에 있지 않고 옆구리의 구멍에 있다. 스테판 에셀의 책 '분노 하라'는 표지에서 부터 번역이 좀 아쉬운 책이다. 나라면 이 책의 제목을 '저항 하라'로 고치겠다. 그는 우리에게 쉽게 저항하기를 요구한다.

나는 저항의 관점에서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유형은 만족하는 자다. 그의 이상은 이미 이 사회에 구현되어 있다. 그는 열심히 생산하거나 소비하거나 개발한다. 그러나 그는 이 사회를 공고히 할 뿐이며, 그 자체로 끊임 없이 자기 증식 되는 클론 중 하나일 뿐이다. 다르게 말해, 어떤 관점에서 그의 인생은 쓰잘대기가 없을 뿐 아니라, 만족하는 탓에 의미 있어질 기회를 상실한다. 두 번째 유형은 불만족하여 그저 분노하는 자다. 그의 이상은 이 사회와 거리가 멀다. 그러나 사회 구조를 파괴하는 대신 사회의 일부로서 다른 일부를 공격한다. 그가 당한 부당함은 이 사회가 원했기에 만들어진 합의에 의한 부당함이다. 노동자가 자본가보다 더 적은 부를 누리는 것은 자본주의의 합의다. 우리는 자본가가 되기를 장려한다. 지금 세대의 청년이 과거 장년이 누렸던 성장의 기회를 갖지 못 하는 것 역시 우리 모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이다. 우리는 고작 청년들에게 계급 탈출의 기회를 주기 위해 과거 최빈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 두 번재 유형의 사람들은 이를 극복하려 소송하고 토론한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은 이를 통해 부당함으로부터 탈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자본가를 장려하는 이상 탈출한 개인이나 집단의 노동자 대신 다른 어떤 이가 그 자리를 차지할 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애써 탈출한 자들은 다시 첫 번째 유형의 사람들이 된다. 나는 이 것이 어린아이와 같은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세 번째 유형의 사람, 저항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혁명가인 그들은 자신의 이상이 이 사회에 있지 않음을 깨닫고 저항한다. 과거 세계가 지금 같이 조밀하지 않았을 때, 이 유형의 사람들은 그들의 동지를 이끌고 변방을 개척했다. 그러나 지구가 둥근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이들은 보다 직접적인 방법으로 투쟁한다. 만약 모두가 계급 탈출의 성장 기회를 갖는 것이 이상인 사람이라면 마땅히 현재의 부를 파괴해야 한다. 그 것이 본인의 아버지, 혹은 본인의 일부일지라도 파괴 없이 새로운 성장의 기회가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가난해 진다는 무거운 사실에 대한 책임을 질 때에만 이들의 이상이 구현될 수 있다. 이들은 체 게바라와 같이 죽는 순간 까지 저항하며, 그로 인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피력한다. 세상이 변화한다면 그 것은 당연히 이들의 탓이다.

홍콩에서는 연일 투쟁이 이어지고 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민주주의이나, 보다 구체화시켜서 적는다면, 반 중국, 친 미, 반 공산주의, 친 자본주의다. 아마도 나와 그들이 한 사회에 함께 존재하였더면 나와 그들은 대척점에 있었을 것이고, 나는 그들의 친미 행각에 저항 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저항이 아름다운 것은, 오직 '저항'의 가치 탓이다. 그들은 저항을 통해 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찌 되었건 새로운 이상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적어도 쓰잘대기 없는 힘 빠진 붕어 틈에서 그들은 쓸모 있을지도 모르는 힘 찬 작은 물고기다.예수와 브루주아를 찬미하듯, 그들의 저항을 찬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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