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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일기

2020 0321_동백

  어찌 되었든 봄은 온다. 회사의 인터넷 사보를 보고서야 그것을 알아챈다. 그러고 보니 건너편 숲에 하얗고 노란 꽃이 드문드문 올라왔다. 창가의 튤립 화분도 꽃대를 길게 뽑았다. 옥상에서 커피를 마실 때도 외투를 입기 귀찮아졌다. 자동차 손잡이는 황사로 노랗다. 이렇게 맹렬히 봄을 알리는데도, 고작 사보라니. 어느덧 회사가 알려주지 않는 것은 알기가 어렵다. 그건 회사가 주는 돈 없이는 살기 어려운 것과 닮았다.

  사보에서는 다가올 봄에 가장 기대되는 꽃을 설문한다. 사우님들의 의견을 댓글로 알려달라고. 이런 인터넷 사보 누가 보나 싶지만, 항상 놀랍도록 많은 댓글이 달린다. 벚꽃이 물론 가장 많고, 개나리니 목련이니, 가끔은 웃음꽃이라는 실없는 사람도 있다. 나는 철부지같이 동백을 떠올린다. 올해는 눈이 없어서, 동백이 충분히 아름답지 못했다. 내가 떠올리는 것은 재작년 겨울 제주 눈보라 속의 동백이다. 겨울과 봄의 경계에서, 나는 놀랍도록 겨울에 서고 싶다. 겨울은 이미 내 손에서 흘러내리고 있지만, 어찌 되었든 올 봄도, 어찌 되었든 만개할 벚꽃도 아직은 미래의 일이다.

  의심하는 것은 나의 버릇이다. 봄이 올까. 어찌되었든 오긴 하겠지만 예전만 할까. 그러므로 나의 선택은 언제나 위축된다. 누군가에게는 냉소적이어 보일 수도 있겠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불확실한 미래가 맹렬히 다가온다. 내가 한때 소유하였던 과거가 멀어지는 속도 역시 그와 같다. 멀미가 난다. 나는 속도광이 아니다. 내가 운전대를 잡지 않았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나는 당면한 미래에 저항하여 과거를 더듬는다. 아직 오지도 않은 봄은 이리도 생기 넘치는데, 이제 막 지나간 겨울은 이미 바스러지고 있다. 약속된 것 보다 지나간 것이 소중한 이유다. 봄이 오면, 동백은 꽃잎 한 장 한 장 흐르는 것이 아니라 꽃잎이 전부 붙은 채로 한 송이씩 떨어진다. 꽃잎 한 장 잃기 싫어하는 절박함이 마음에 든다.

  그렇다 하더라도 가장 기대되는 봄꽃을 묻는 설문에 동백으로 답할 수는 없다. 우리는 달갑지 않은 것들 앞에서 얼마나 많은 선택을 강요받는가. 애초에 과거가 그렇게 맹렬히 사라지지 않았다면, 나는 돌아서서 과거로 달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엄두가 나지 않으므로, 제자리에 주저앉는다. 롤러코스터는 앞으로 달린다. 그래도 벚꽃이 좋으려나, 나는 그렇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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