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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에세이

낮과 밤

  나는 830분까지 출근하고, 530분에 퇴근한다. 지난 세기 노동자들의 처우를 생각한다면 고작 여덟 시간을 일하고 굶지 않으니 고마운 일이다. 나는 이를 밥 먹기 전 감사 기도를 올리듯 감사한다. 누구에게 감사해야 좋을 지 사실 잘 모르겠다는 말이다. 하느님이든 농부든, 전태일이든 박정희든 하여튼 반은 욕인 이 감사 인사를 받으라지. 나는 만족하면서도 동시에 힘이 든다. 나는 어떤 개 돼지가 말했듯이 어쩔 수 없는 개 돼지이므로 어쩔 수 없이 덜 일 하고 더 먹고자 한다. 이 욕심에 끝이 있을까. 아니, 그렇다고 해도 일단은 한 시간만 덜 일 하면 좋겠다. 겨울 나의 삶엔 석양이 없기 때문이다.

  테드 창의 소설 바빌론의 탑에서 주인공은 탑을 오르며 밤이 산의 그림자임을 목격한다. 산의 그림자가 세상을 삼키는 것은 연속적인 과정이다. 밤은 갑자기 찾아오는 암전이 아니고, 낮 역시 눈부심이 아니다. 개 돼지가 되기 전의 우리는 모두 이것의 목격자였다. 작게 본다면 이는 전등의 탓이다. 전등이 개발되기 전의 사무실은 창문이 크고 한쪽 방향으로 좁았다. 굳이 햇빛이 닿지 않는 방에서 비싼 촛불을 켜고 일하기에는 당시의 사무직 생산성이 지나치게 낮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등이 개발되고 생산성이 높아지자 우리는 깊은 토굴 같은 사무실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에게 낮의 길이는 태양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전등의 스위치만이 우리에게 낮을 인지시킨다.

  그러므로 나는 석양을 잃었다. 일하는 동안은 가장 적절한 조명에 노출 되고 퇴근 게이트를 통과하면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인다. 이러한 digitize 속에서 태양은 실제로 의미를 잃는다. 그러므로 밤 역시 그 의미를 잃는다. 나의 삶 속에서는 신화가 탄생할 수 없다. 내 손가락이 신이고 나의 일이 이야기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장 전지전능한 권한을 손에 넣었으나 나의 삶은 나의 사장의 손에 복속되어 있다. 그 대가는 얼음이 나오는 냉장고, 300개가 넘는 채널, 최신의 휴대폰이다. 이들 속에서 나는 정신을 잃는다. 만약 내가 한 시간만 덜 일 한다면, 내 것은 아닐지라도 석양을 목격할 것이다. 이는 내게 태양의 존재를 상기할지 모른다.

  무릎 담요와, 편안한 의자와, 핸드 드립 커피, 그리고 석양의 analogue를 상상한다. 물론 계좌 속 digital이 있을 때 가능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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