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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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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phabet series 비판 루이비통의 마크를 형상화한 것이 분명한 사진 작품 앞에서 미소 짓고 있는 두 사람은 Vanessa Beecroft와 Jean Marc Gallot이다. Beecroft는 작품의 작가로서, Gallot은 이 전시장을 제공한 루이비통의 President로서 이 자리에 섰다. 루이비통은 샹젤리제 거리에서 주말에도 본인들의 상품을 판매할 권리를 막 얻은 참이었고, 이 사진 작품은 그것을 기념하는 훌륭한 승전비가 될 것이었다. 루이비통은 Beecroft가 이 연작들에 대한 저작권 분쟁에 휘말리게 될 때까지 이 작품을 샹젤리제 거리에 전시하였다. 이 작품은 또한 Vanessa Beecroft의 알파벳 연작을 구글에서 검색할 때에 가장 처음 등장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구글의 검색 순위는 예술로서의 가치를 나타..
낮과 밤 나는 8시 30분까지 출근하고, 5시 30분에 퇴근한다. 지난 세기 노동자들의 처우를 생각한다면 고작 여덟 시간을 일하고 굶지 않으니 고마운 일이다. 나는 이를 밥 먹기 전 감사 기도를 올리듯 감사한다. 누구에게 감사해야 좋을 지 사실 잘 모르겠다는 말이다. 하느님이든 농부든, 전태일이든 박정희든 하여튼 반은 욕인 이 감사 인사를 받으라지. 나는 만족하면서도 동시에 힘이 든다. 나는 어떤 개 돼지가 말했듯이 어쩔 수 없는 개 돼지이므로 어쩔 수 없이 덜 일 하고 더 먹고자 한다. 이 욕심에 끝이 있을까. 아니, 그렇다고 해도 일단은 한 시간만 덜 일 하면 좋겠다. 겨울 나의 삶엔 석양이 없기 때문이다. 테드 창의 소설 바빌론의 탑에서 주인공은 탑을 오르며 밤이 산의 그림자임을 목격한다. 산의 그림자가 세..
저항예찬 1993년 대전의 하천은 누가 보아도 더러웠다. 아마도 전교조였던 우리 선생님은 이 같이 썩은 물에서는 실지렁이 밖에 못 산다며 목이 터져라 열을 내셨고, 학기에 한 번정도는 갑천변에 나가 쓰레기를 줍는 봉사활동을 시켰다. 썩은 물 가득한 물가에서 검은 봉지 가득히 쓰레기를 줍고 나면, 천이 깨끗해졌다기 보다는 나까지 이 천에 동화되어 손 바닥 깊숙한 곳에서 악취가 느껴졌던 곳, 그런 곳에서도 외할아버지는 출조하실 때 마다 팔뚝만한 잉어인지 붕어인지를 너댓마리 씩 잡아오시곤 하셨다. 무뚝뚝하셨던 서산 사람 친할아버지와 달리, 나의 서울 사람 외할아버지는 기쁨을 감추지 않으셨다. 집에 돌아오시면 손주들에게 자랑할 겸 우리 집 빨간 고무 대야에 물을 채워 잡아 온 물고기들을 풀어 놓으셨는데, 한 번 날카로운..
이집트 지난 2009년, 신종플루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이집트는 자국 내의 모든 돼지(25만 마리)를 도살하였다. 신종 플루에 의한 수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직후였다. 그러나 이 빠르고 단호한 조치는 며칠 후 WHO가 돼지와 신종 플루가 무관함을 선언하며 25만 생명을 담보로 한 블랙 코미디의 소재가 되었다. 돼지가 먹어치우던 음식물 쓰레기가 범람하면서, 카이로가 쓰레기 도시가 되었다는 소식이 이 블랙 코미디의 마무리. 아마도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무지한 이집트 관료의 단호한 얼굴을 기억할 것이다. 많은 경우에 단호함은 무지를 동반한다. 세상사에 단호해져도 좋을 만큼 단순한 일은 많지 않다. 그러나 앞서 소개한 이 사건의 개요에는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이 몇 가지 빠져있다. 우선, 이집트가 돼지를 도살..
정의로움 초등학교 시절 공산주의에 관해, 정확히는 그들의 몰락에 관해 배울 때, 교과서가 그 원인으로 지목한 것 중 노동에 대한 동기부여의 실패가 있었다. 다사다난했던 공산주의의 몰락 과정을 초등학생에게 가르치는 것은 적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결과론적 관점에서 이제껏 존재하였던 공산주의의 단점을 그렇게 설명하는 것에 대하여 딱히 반론하고 싶은 것 역시 아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이를 배우면서 우리 체계의 정의로움에 한 껏 들떴던 것이 생각나 잠시 부끄러울 뿐이다. 그때의 나는 능력 있는 자가 더 많은 것을 가져가는 우리 체계의 정의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왜일까. 아마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가 그게 정의라고 나에게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어린아이는 그렇게 사회화되는 법이다. 지난주 우리 회사로부터, 적절한..
선택적 윤리 박민규를 좋아한다. 그의 작품뿐 아니라, 그의 생각, 그의 기행까지 좋다. 지난 십여 년 동안 나는 그의 빠돌이였고, 그는 나의 아이돌이었다. 처음 읽은 것은 단편집인 '카스테라'였는데 그것은 참으로 텅 빈 냉장고에서 발견된 빵 같은 느낌이었다. 특이한 작가다.라고 생각했다. 05년도에는 모든 문학에 어느 정도의 데모크라시와, 다시 말해 전두환과, 다르게 말하자면 민주주의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것은 90년대 모든 문학에 하루키가, 다시 말해 존재론과, 다르게 말하자면 노르웨이의 숲이 있었던 것이나, 2014년 이후 모든 문학에 부끄러움과, 다시 말해 세월호와, 다르게 말하자면 무력감이 섞여 있었던 것, 그리고 나아가 2019년 모든 문학에서 페미니즘과, 다시 말해 헤이트 스피치와, 다르게 말하자면 분노..
카페 190120- 아이가 낮잠을 자는 사이 잠시 시간이 남아 예전에 자주 다니던 카페에 왔다. 오후에는 키즈카페를 겸하는 작은 동물원에 가족 나들이를 가기로 했으므로, 그야말로 잠시의 여유다. 몇 년 전 나는 단지 사람이 없어 보인다는 이유로 새로 생긴 이 카페에 들렀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직 가게를 오픈하기 전이었단다. 그런 설명을 하면서도 자리를 권하는 사장님이 좋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를 내오는 사장님이 좋았었고, 무엇보다 그렇게 시음아닌 시음을 하게 된 무료 커피가 좋았다. 커피를 마시는 내내 사장님은 세심하게 커피 콩을 고르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상당히 자주 이 곳에 들렀다. 내가 결혼을 하기 전의 일이다. 그게.. 벌써 몇년이나 되었다. 오랜만에 들른 이 카페에는 전에 자주 뵙던 사장..
2018 제주 제주 첫날. 여섯 시에 일어나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조금 서둘러 청주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아홉 시 쯤이어서 여유있게 탑승할 수 있었다. 도진이에게는 이번 제주행이 생애 첫 비행이었는데, 그런 것 치고는 굉장히 태연하여 대견하였다. 제주에 도착해서도 제 때 아이 밥을 먹이고, 적당히 재우고, 사이 사이 맛있는 음식과 여유 있는 드라이브를 즐겼다. 우리 셋 모두 행복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모처럼의 제주를 즐겼다. 여행의 첫 날로서, 더할나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켠이 먹먹한 것은, 이 섬이 나의 가장 부끄러운 기억을 일께우기 때문이다. 김애란은 '눈먼 자들의 국가' 에서 당분간 '세월'은, 혹은 '침몰'은 은유로서 사용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나에게는 제주 역시 그렇다. 이 섬이 아..